최근에 수강 중인 카운셀링 수업에서 삶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한 셀프 카운셀링 프로젝트를 과제로 받았다. 프로젝트 이름이 Suffering and Refuge 인데, 보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난 주제가 있었다. 어쩌면 무난했다 생각할 수 있는 나의 30년 인생살이 중 그래도 ‘고통과 상처’를 논하자면 단연 생각나는 일이 였고 그 일을 주제로 삼는건 내겐 너무 당연한 일이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 과제는 과거에 문제에 대해 기록하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현재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셀프 카운셀링이 주 목적이였다. 이런 맥락에서 내게 있었던 과거의 고통은 현재를 좌우 할만큼의 효능이 없었다. 이미 몇차례에 거쳐 치유된 상처였고 딱정이가 말라 떨여저 흉터조차 남아있지 않도록 주님께서 만져주셨기 때문에 굳이 과제를 위해 효능이 없는 고통을 쥐어짜낼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그럼 나는 고통이 없나? Suffering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무엇을 써야하나 고민 하던중 지금 현재 내가 마주하고 있는 ‘작은 고통’에 직면 해 보기로 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작은 고통’은 다름 아닌 가끔씩 터져나오는 화(anger)였다. 화 안내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고 잘 풀기만 하면 되지 화좀 내면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오히려 화 안내고 쌓아두다 속병걸리는 거 보다 낫지! 라고 주윗사람들은 위로 해주었지만 그 안에는 나만 알 수 있는 심각성이 있고 화를 낼때는 늘 나만 아는 패턴이 있다.
나만 아는 심각성과 패턴
작년에 태어난 하율이가 벌써 돌이 되었다. 그리고 내 첫사랑 하루가 누나가 된지도 1년이 되었고 우리딸은 곧 만 3살이 되어간다. 어느 엄마가 안 그러겠냐만 우리 하루는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사랑스럽고 예쁘고 내눈에는 최고다. 미국에 love you to the moon and back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내 마음이 정말 그렇다. 달나라에 갔다가 다시 올만큼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내가 화나는 경우를 들여다 보면 항상 하루를 향하고 있고 그렇게 사랑스러운 딸인데도, 심지어 만 3살 조차도 안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어린아이 짓에 너그러히 넘어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시시때때로 발견한다. 말이 좋아 ‘어린아이 짓’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땡깡과 들어누움, 엄마가 지칠때까지 버팅기는 굉장한 고집과 말안들음 이런 행동들이다.
나의 화가 인내심을 뚫고 나올때는 주로 밤 시간이다. 그렇다고 밤에만 그렇다는건 아니다. 밤에 특히 심하고 동생 물때,운전할때, 말안들을때 엄마들이라면 상황은 굳이 말안해도 다 알꺼라 생각된다. 하지만 밤에는 이런 상황들이 보다 자주 일어난다.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 이제 곧 육아의 쉼이 보일 무렵이자 나의 에너지와 인내심이 거의 바닥날 쯤 이다. 하루는 2살 넘어서 까지 밤에 최소 2번에서 3번 많게는 그 이상까지 깨어났다. (요즘에는 좀 덜해서 살것 같다) 게다가 아이 나이의 특성상 졸려 쌍커풀이 두툼하게 생길때 까지도 절대 안잘꺼라 버팅기며 잠드는것을 거부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때 마다 나는 마음이 답답하고 그 흔한 ‘육퇴'(육아퇴근)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난다. 게다가 아이들 따로 재우기에 실패한 우리가족은 결국 침대두개를 붙여 co sleep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를 재우러 들어갈때면 이미 하율이는 다른 한쪽에서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다행히 하율이는 비교적 잘자서 재우는것도 아주 오래걸리지는 않고 밤 중에도 하루 한창때보다는 훨씬 덜깨지만 그러다 한번씩 하루 땡깡 부리는 소리에 하율이가 깨어나면 거기서 발생하는 좌절감과 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감사하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머리로 몇번이고 생각했던 일을 저지르지는 않아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하루가 자기직전 생때를 부리며 육퇴의 꿈을 묵살시켜 버릴때 심한경우 아이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여기서 때리고 싶다는건 그냥 단순히 엉덩이 까고 맴매 수준이 아니다. 훈육할때 엉덩이 맴매야 진작에 해봤다. 하지만 이런경우에는 그냥 생때이기 때문에 오히려 맴매는 더 큰 때를 유발할 뿐 들지 않았다. 화가 날때 나는 주로 말로 아이를 공격했다. 소리를 지르며. 지금 글을 쓰면서도 3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내가 화로 던진 이 말들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차라리 못알아 들었길 기억 못하길 기도하게 된다. 나는 주로 아이에게 협벽식의 어조로 ‘너 이렇게 하면 망태할아버지 한테 잡아가라 그럴꺼야!’ ‘너 그러면 혼자 옷장에 들어가서 타임아웃 시킬꺼야!’ 이렇게 잘못된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었고 소리를 지르며 ‘너 정말 왜그러니!’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 ‘좀자!!’ 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신경질 부리지 말라고 내가 신경질을 부리며 화를 내고 모순의 연속이다.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오래걸리든 아이는 결국 잠에들고 그 후에는 후회가 쓰나미 처럼 몰려온다. 딸이 기댈 수 있는 가장 편한 자리가 되어주고 싶은 나의 품은 그 자격을 박탈당한 기분이 들고 좋은 엄마의 모든 조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조항들로 느껴진다. 하루가 첫째딸이고 나 또한 첫째딸로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사랑해 주고 싶다 생각해 왔고 또 그럴 수 있을거라 자신 해 왔는데 조금도 너그럽지 못한 내 모습에 좌절하게 된다. 하루와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고 기초부터 탄탄히 하고 싶어서 아이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싶어서 홈스쿨링도 생각 했었고 무엇보다도 가정교육이 가장 중요한거 같아 하며 수없이 스스로에게 외쳐왔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모순된 내 현실과 직면하는건 나에게도 전혀 쉬운일이 아니었다. 이런 내 모습을 마주하는게 쉽지 않은 사람은 나 말고도 한사람 더 있다. 내 남편, 나의 육아 동반자. 나도 남편이 아이들을 정당성 없이 혼내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쁜데 남편도 똑같겠지. 그렇게 큰 잘못을 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인내심이 바닥나 불같은 화로 반응하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떻게 비추어질까 생각하면 오만가지 감정이 다 들어온다. 분명 나를 판단하고 있을꺼야, 우리 결혼을 후회하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을 하다보면 어느새 또 그럼 왜 처음부터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모든 부담을 나 혼자 지게 하는데, 자기가 내 상황이라면 뭐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건데 하면서 또 다른 화로 번진다. 굳이 이런 감정들을 남편한테 쏟아내지는 않지만 남편은 자연스레 멀게 느껴졌고 정서적으로 멀어짐을 느끼니 육체적인 관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이 화로 인해 우리가족 여러사람의 마음이 다치고 관계의 문이 닫혀지고 있었다.
화의 부작용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잠에 일어난 아이는 우리 어른들과 같지 않아 전날밤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이 웃고 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더 무너져 내리고 오늘은 정말 잘할께 엄마가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말로 굳이 하지 않았다 생각나게 할까봐) 아이를 안아준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바뀌지 않는다. 당연하지 아이니까. 그렇게 똑같은 상황을 꾸역꾸역 참아보며 하루하루를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또 모순된 행동을 저지르게 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엄마와 분노 조절에 실패한 무서운 엄마 사이에서 아이가 혼돈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까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사실 과제를 위해 써 내려 가다보니 알게 되었다. 우리 가정에만 있는 문제는 아닌거 같았고 내 화 때문에 아이들이 어둡고 정서적으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것도 아니고, 아이들 어렸을때 시행착오 없는 부모가 어디있고 그러면서 우리 어른들도 같이 커가는거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던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과제의 주제로 주신데에는 이유가 있고 지금 내게는 보이지 않는 죄의 파급력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내 안에 있는 화를 그냥 이렇게 고삐 풀린체로 내버려두는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나의 힐링구절: 고린도전서 13장
자려고 누웠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이 떠올랐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내게 있어 치유의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성경구절이다. 구절들을 혼자 조용히 묵상 해 보다 한번 꺼내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캄캄한 방에서 핸드폰으로 성경앱을 틀어 읽어 보았다. 그런데 새롭지 않은 그 구절들 안에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새로운 은혜들이 마음속에 꿀송이 처럼 떨어져 왔다. 너무 유명한 구절들 이기 때문에 크리스챤이 아닌 분들도 노래를 통해 접해 봤을 수도 있을 사랑에 관한 구절들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 들로 다가왔다. 아래는 Love를 God으로 바꾸어 적어 보았다.
God is patient and kind. He does not envy or boast, He is not arrogant or rude. He does not insist on His own way. He is not irritable or resentful. He does not rejoice at wrongdoing, but rejoices with the truth. He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and endures all things. He never ends.
(1Corinthian 13:4-8)
이 구절들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건 나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이었다. 겸손 하셨고 오래 참으셨고 그분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셨고 모든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내신 그 십자가 사랑이 상한 내 마음을 덮었다. 하나님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다. 어떻게 발버둥 처도 잘 되지 않아 속상하고 좌절하고 상처입은 나의 마음에 먼저 치유의 손을 건내셨고 엄마로 부름 받기 전 하나님의 딸로 먼저 부르셨다고 말씀 해 주셨다.
하루와 나 사이에서 언제나 하루의 마음을 상하게 한 가해자는 나였고, 원인 제공을 한 3살 자리 아이를 탓 할 수 없었던 엄마는 스스로를 탓해 왔고, 이런 내가 너그럽게 아이를 받아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기전 내게도 치유가 필요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건강하지 않은데 내가 하는 사랑도 건강 할 수 없었다. 물론 가끔씩 아이들 없이 스타벅스에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좋아하는 드라마도 보고 아주 가끔씩 남편이랑 둘이 시간 보내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런 쉼 들도 내 삶의 활력을 찾아주고 한 숨돌리게 끔, 다시 에너지 충전도 하게끔 도와주지만 고린도전서13장을 통해 내게 주신 치유와 안식은 전혀 다른 차원 이었다. 위에도 썼듯이 내가 화를 내고 그로 인해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나 그에 대한 부작용이 나의 매일매일의 삶을 좌우 할만큼 우울하거나 아주 많이 지쳐 쉼을 필요로 한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손에 박힌 아주 작은 가시도 빨리 빼어내고 낫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처럼 십자가의 사랑도 내 안에 조금의 결핍도 용납할 수 없을만큼 날 사랑하고 있다는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 에게도 동일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딸아 너를 사랑해 아파할 필요 없어 너는 내 딸이야. 그리고 네가 기억 해야 할게 있어. 하루도 내 피값으로 산 내 딸이란다. 그 아이가 다치는걸 나도 원치 않아.”
고린도전서 13장으로 육아하기
마음의 쉼을 얻고 나니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님, 어떻게 하면 성경적으로 아이를 키워 낼 수 있을까요? 제 마음 다 아시잖아요. 저 정말 원하고 있는거 아시잖아요. 저 정말 좋은 엄마 이고 싶어요. 어떻하면 할 수 있을지 자세히 가르쳐주세요.” 인내하고, 받아주고, 인정 해 주고, 많이 안아주고, 사랑 해 주고, 물론 그렇게 키우고 싶고 항상 그러고 싶지만 실질적으로 삶에 적용하기에는 나의 약함이 너무 크고 방법들도 너무 추상적이다. 그 이상의 방향과 지침이 필요하다 느꼈다.
그때 내 마음속에 주신 음성은 이러했다. 그냥 계속해서 내 사랑을 배우고 느끼고 묵상하고 그 안에 거하라고.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계속해서 사랑을 묵상하라는 마음이 들었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정답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육아에 대한 대답을 원했지만 어느때 와같이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 하셨고 하지만 그 대답이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렇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 아이 마다 성향도 성격도 배움의 속도와 습득할 수 있는 양도 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아기를 좋아해 동생이 태어나도 많은 질투없이 곧잘 동생을 받아 줄 수 있는 방면 유난히 질투가 많은 아이는 엄마가 어떻게 애를 써도 결과에 크게 영향을 못미치는 거다. 어떤 아이는 칭찬받는 말로 사랑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아무리 말로 해줘도 안아 주고 뽀뽀 해 줘야 그게 사랑이구나 느낄 수 있고, 엄마 곁에서 백날 붙어 있어야 행복한 아이가 있고 자유롭게 뛰놀아야 이게 행복 이구나 느끼는 아이가 있기에 육아에는 정말 정답이 없다. 하지만 사랑에는 정답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라온 배경과 받아온 사랑에 의존되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통해 받은 사랑에는 분명 한계가 있고 완전 할 수 없음은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나타나는 사랑의 완전도가 떨어질 수록 완전한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스레 눈살을 찌뿌리며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비난 하게되고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사랑을 받고 자라 갖고 있는 사랑의 모양이 완전 할 수록 우리는 그걸 정상적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에게 심한 훈육을 받아온 아들이 있다 하자. 매를 맞을 때는 죽도록 고통스러웠을지 몰라도 훈육이 반복될 수록 고통과 아버지의 사랑에는 연결고리가 맺어질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사람의 성향과 어떤 인생을 살아 왔냐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겠지만 이 아들 본인이 아버지가 되었을때 그의 아이들에게 사랑의 매를 가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에게는 사랑의 매 하지만 그것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벗어날 지라도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사랑이 왜 부족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고린도전서13장에 적힌 하나님의 사랑은 정답과 같이 다가왔다. 너무 완전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나의 질문에 주님은 그 완전한 사랑을 묵상하고 배우고 느끼며 그 사랑을 아이에게 실행 하라고 말씀 하신다. 그것이 the way라고 말씀 하신다.
이 범접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 할 수 있게금 하는 비밀도 함께 말씀 해 주셨다. 바로 마지막 8절에 사랑의 마지막 특성으로 적힌 “Love never ends”였다. 다른 구절들과 같이 그날 나에게 이 구절은 “God never ends”로 다가왔고 이는 노아에게 주신 약속의 무지개 처럼 다가왔다.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은 한 줄기에 빛과 같이 느껴진다. 너는 넘어질 수 있지만, 나의 사랑은 넘어질 수 없단다. 그냥 끝까지 내게 와서 배우고 내게 와서 구하렴 나머지는 내가 채울께. 더 간단하게는 “It’s okay, I got your back!”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씀 해 주셨다. 그가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십자가가 그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건지 이미 아시기에, 내가 절대 할 수 없는것 임을 아시기에 그가 나를 위해 해주시겠다는 그 응원이 어찌나 위로가 되고 든든하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내가 넘어져 또 하루의 마음을 속상하게 할때에도 (그렇다고 방심하겠다는건 아니지만) 나를 향한 그 사랑이 우리 하루도 동일하게 지켜주고 계심을 믿기로 했다. 결국 또 똑같은 결론이였다. Love Him, Trust Him and learn from Him.
셀프 카운셀링, 그 후
난 여전히 화가 난다. 안 잔다고 땡깡놓고, 그 땡깡에 하율이가 깰까봐 조마조마하고, 차에 태우는 것도, 옷을 입히는 것도, 양치를 시키는 것도 어느 하나 말 해서 한번에 듣지를 않는다. 그리고 셀프카운셀링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한번 넘어졌다. 하율이 돌날 준비 과정 중 이런저런 이슈로 마음이 좋지 않은데다 할일은 산더미인데 뭐 때문인지 고래고래 울면서 소리지르고 결국 먹던 바나나를 집어던지는 만행을 저지를 딸내미를 그냥 넘어가 주지 못했다. 돌 사진 찍기 직전이라 다같이 바쁜데 아이를 잡는 바람에 남편도 풍선에 헬륨 넣으러 가려고 신발 신다가 다시 벗고 와서 하루를 달래고 오히려 일이 더뎌졌다. 남편도 웃지 않았고 다들 내 눈치만 보는거 같았고 내가 바라던 둘째 아들 돌 잔치 준비 풍경이 전혀 아니었다. 어쨌든 저쨌든 기쁜날 손님도 맞이 해야하고 잘 넘어가고 하루도 달래주고 풀었지만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시 때때로 말씀으로 돌아가 내 마음이 다른것들로 차기 전에 미리 사랑으로 채워 넣어야 되겠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래도 그 후 몇가지 긍정적 변화들이 있다:
첫번째, 나의 사랑이 실패했을 때에도 이에 맞선 나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었다. 사소한 육아의 넘어짐에도 어지러운 생각들이 들어오기 전 내가 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그분의 품은 언제나 완벽한 치유와 충전을 준다.
두번째, 화를 불어 일으키는 상황들에 대해 전보다는 조금 더 담대 해 진 것 같다. “You try to get me? bring it on.” 이런 느낌으로. 물론 말했다시피 넘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세번째, 남편의 육아 참여에 대한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고 고마움을 느낀다. 남편과 정서적으로 다시 가까워 졌다. 살면서 남편이 멀게 느껴질 때도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는 거겠지만 이번 셀프카운셀링 후 결과는 꽤나 리얼하다. 사실 그날도 하루를 달래는 모습에서 나를 판단하는 느낌이 있어 기분이 더 망쳐진 건 사실 이지만 좋은 자극과 적지않은 위로도 되었다. 내가 할 수 없을때 아빠의 품이 있는 하루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내일을 마주할 내 마음에 소망이 있다. 내일은 꼭 고린도전서 13장 묵상하고 하루를 시작해야지, 아니 지금 한번 더 묵상하고 잠들어야지 생각하며 내일 사랑으로 충전되어 있을 내 모습과 그렇게 마주할 하루의 미소에 행복 해 진다.